우리 할머니 장롱 위에는 아주 오래된 레코드 판 상자가 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언젠가(아마 50년쯤 전일까요) 할머니한테 선물하신 거랍니다.
그시절엔 다 그랬겠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생전 받아본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레코드 판들... 정말 명곡들은 다 들어있어요.
할머닌 요즘 나온 기계들을 잘 못 다루셔서 듣지도 못하시고 몇십년을 그냥 모셔두고 계셔요.
몇년 전에 내가 집에 갔을때 엄마 아빠 없을때 꺼내서 틀어드렸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 속을 많이 썩이셨답니다.
괜찮은 직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그만둔 후 사업을 하다가 돈을 몇번이나 날리고.. 걸핏하면 집을 나가 한참동안 연락이 없으셨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찾아가보면...
그러다가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시는 할머니 얼굴엔 그런데 아무 회한도, 미움도,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냥 기억들일 뿐이지요.

나에게도 그런 평화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1.12.14

남인수. 황성옛터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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